자평학은 오대 말(五代末)에서 송 대촌(宋代初)의 혼란기에 나온 명리학이다. 혼란의 전초는 이미 당대의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총애하고 환관 조력사(高力士)를 가까이하여, 조정의 모든 정사를 재상인 이임보(李林甫)와 후임인 양귀비의 사촌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에게 일임하여 정치는 하루가 다르게 부패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토지 겸병이 가속화되면서 빈부 차이가 현저하게 벌어졌다. 정치·경제·사회 모든 방면에서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하였다. 결국 통치 집단이 부패하면서 ‘안 사(安史)의 난’이 발발할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755년부터 763년에 걸쳐 일어난 안 사의 난으로 인해 당나라 왕조는 번영에서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전쟁을 거치면서 특히 황화 중하류 유역의 백성들은 전에 없던 환란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북방 경제는 크게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사회 모순은 더욱 격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봉건사회는 최고의 전성기에서 쇠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면서 중국에서 변방을 평정하기 위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던 번진(藩鎭)에서 전국적인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번(藩)’은 호위대, ‘진(鎭)’은 군사거점 지역인 군진(軍鎭)을 가리킨다. 봉건 왕조에서는 군진을 설치하여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세력이 오히려 중앙정권을 위협하는 땅을 나누어 차지하는 할 거 세력을 형성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당나라 말엽인 875년에서 884년에 걸쳐 발생한 ‘황소(黃巢)의 난’은 당나라 왕조가 붕괴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당나라 왕조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번진과 할 거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중앙과 번진, 번진과 번진 사이의 세력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결국 907년에 이르러 주전충(朱全忠)에 의해 당나라는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인 후량(後粱) 정권이 탄생했으며, 이런 국면이 오대(五代)의 분열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오대란 당(唐)이 망한 다음에 송(宋)이 건국되어 재통일될 때까지의 54년(907-960) 동안을 말한다. 오대는 대체로 회하(淮河) 이북과 황하(黃河) 유역 일대에 흥망성쇠 하였던 후양(後梁), 후진(後晋), 후당(後唐), 후한(後漢), 후주(後周)의 5개 왕조를 말한다. 오대 시대의 정치는 후당을 제외하고는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모두 번진의 체제였고, 그 중심은 절도사(節度使)를 중심으로 구성된 무력집단이었다. 정국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중앙에서는 지방의 세력을 제압 통제하지 못하였으며, 또 지방의 세력도 끊임없는 내분과 충돌 속에 있었으므로 변란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청대(淸代)에 나온 『자평 팔자 사언 집약(子平八字四言集腋)』에는 명리학의 기원이 주(周) 나라의 ‘낙록자(珞琭子)’와 ‘귀곡자(鬼谷子)’부터라고 되어 있지만, ‘사주’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나라 초로 추정되는 원천강(袁天綱)이다. 그 후 당나라 말기에 이 허중(李虛中)이 『이허 증명서(李虛中命書)를 편찬하여 사주 학위 중요한 개념을 정리하였다. 이 허준은 바로 ‘안 사의 난’이 끝날 무렵인 761년에 태어나 혼란기인 헌종(憲宗) 때 전중(殿中) 시어사(侍御使)까지 한 인물이다. 그가 어떻게 벼슬을 하게 되었고 어떻게 벼슬에서 물러났는지에 대한 상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회적 혼란기에 미래 예측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의 명리학을 정립하는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평명리학이 나온 시기는 이하 중의 명리 서가 나온 시기보다 더욱 혼란이 심할 때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 혼란기에는 무엇보다 민중들의 생활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전란의 연속 속에서 현재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고 미래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민중들은 자연스럽게 운명 예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때 출현한 것이 ‘자평명리학’이었던 것이다. 이 허준은 조정관리까지 지낸 인물로서 가문을 중요시했을 것이며, 이것이 연주(年柱) 중심의 명리학을 정립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자평명리학은 사회적 혼란에 시달렸던 민중들의 개인 생활에 더욱 중요성을 알고 일 주(日柱) 중심의 명리학을 정립하게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한국 명리학 협회장 박병수, 『자평진전 』 명리 이론 연구, 경기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4,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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